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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사진=무록

고아한 한 송이 꽃, 그녀가 엮어낸 이야기 ‘명불허전’

 

국가무형유산 태평무 기획공연

명불허전名不虛傳

2024년 5월 29일 (수) 19:30 / 아양아트센터 아양홀

 

- 글 : 최윤정

- 진행/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되지 않았음에도 타오르는 더위 아래, 아양아트센터에서는 점으로 된 파도가 한 차례 덮쳐왔다. 5월 29일 아양홀에서는 벽파 박재희 아래에서 엮어진 한국의 전통무용 공연이 상연되었다. 碧波(푸를 벽, 물결 파), 박재희를 감싼 푸른 파도 위로 감상에 젖은 노래가 아련하게 흘러나온다. 

 

‘푸른 물결 타고 오신 님 있어’

 

가사 그대로, 차마 선으로 이어지지 못한 푸른 물결은 박재희를 넘지 못하고 부서진다. 물결은 박재희를 품고, 그 아래 고고하게 서 있는 사람은 그 자체만으로도 중심을 잡아준다. 아련한 노래의 끝자락, 벽파 선생이 걸어온 날들을 기록한 글자가 길처럼 이어지고, 비로소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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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무


느릿하게 공기를 훑는 장삼은 적막하지만, 긴장감을 조성하여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구슬퍼 보이기도 한 장삼은 둥- 둥- 일관되게 울리는 북소리 위로 흩날린다. 무대에는 어느새 많은 무용수가 집결되었고, 그들의 머리 위로 열댓 개의 장삼이 동시에 흩날리는 장관이 펼쳐졌다. 하얀 장삼은 같은 리듬에 다른 선으로, 다른 동작에 같은 호흡으로 흔들린다. 


그들이 내려치는 강렬한 북소리는 다른 악기 소리와 마치 하나인 듯 합쳐진다. 강하게 내리치고, 그 음 위에 단단하게 서 있다.


다른 악기 소리가 멈춘 채 오롯이 북소리와 추임새만 울리는 공간은 좌중을 압도한다. ‘웅장하다’는 느낌이 그대로 무대에 구현된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나와 하나의 리듬으로 타악하는 행위만으로 충분히 압도감이 드는데, 하물며 일제히 공중으로 솟구치는 장삼의 위력까지 더해지면 어떠할까. 


무용수가 많아짐에 따라 북소리는 천둥같이 울린다. 북소리에 맞춰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관객들의 감탄 섞인 환호성이 무대를 더욱 살아있게 한다. 북소리에 더해 다시 반주가 시작된다. 당당하고 생기 있는 발걸음이 무대를 누빈다. 장삼을 하늘로 뻗치며 내면을 비운다. 비로소 절제와 내면을 돌아보는 시간, 승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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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춤


농담이 멋들어지게 들어간 산을 배경으로 학이 날아든다. 하얀 깃을 자랑하며 산속에 물을 마시러 온 듯한 움직임을 선보인다.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싸우기도 하고, 고개를 깊이 숙여 부리로 땅을 쪼기도 한다. 우아하면서도 학이라는 생명체의 모습을 표현하며 관객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반경으로 움직이며 온전한 학 한 마리를 표현한다. 


학의 탈을 쓴 무용수들은 학을 흉내 내는 것보다 한 마리의 학이 된 것처럼 움직인다. 저들이 진정으로 학이 된 것처럼 사소한 특징까지도 구현한다. 이 무대 위에서 학의 탈은 그저 거죽이 아니라 무용수들의 얼굴이 된다. 상징적으로 쓰이는 껍데기뿐인 학이 아닌, 사람들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학을 묘사한다. 그렇기에 친근하기도 하고, 더 몰입할 수 있다. 이들의 학은 그들의 인내가 담겨있다. 절제와 고고함을 지키며 한 마리의 학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인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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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살풀이춤


부채 끝에서 차르르 떨어지는 긴 천이 허공을 부유한다. 기다란 천을 제 의지대로 힘을 줬다가 빼고, 품에 안았다가 다시 내던져 투박하면서도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무용수의 갓 위에 달린 두 개의 깃도, 걸친 옷도 모두 하얀 색이라 사위의 절제가 더 정결해 보인다. 명주 천은 펄럭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으며 조용하다. 그렇기에 배경음악 위로 떨어지는 천은 환상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하얀 여백을 무대 가득 그려낸다. 이 여백은 붓으로 그은 것처럼 곧은 직선을 유지하기도 하고, 곡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자리를 마련하기도 한다. 여백은 소리 없이 만들어지지만, 역동적으로 확장된다. 더 넓게, 더 크게 그려지고 채워진다. 그러다가도 천에 이어진 부채에 의해 잘려 나가기도 한다. 이 자체만으로도 무대는 장엄한 힘을 가진다. 무대 위에 무용수의 의지대로 그려내고 잘라내는 행위 안에서 무용수는 자신을 담아낸다. 자신을 담아 천을 묶고 푸는 것, 선살풀이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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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여옥


연한 하늘색과 분홍색의 치맛자락으로 초여름에 봄바람을 몰고 온 여인들이 있다. 이들은 제각기 다른 몸짓으로, 다른 꽃내음을 풍기며 관객들을 애태운다. 손짓 한 번에 나비가 날아들 듯 조심스럽고 애살스럽다. 재는 발걸음은 느릿하게 절제미를 뽐내고, 종종걸음으로 물러나는 발걸음은 사랑스럽다. 


닿을 듯 말 듯, 갈 듯 말 듯 조심스럽게 내딛는 발걸음은 관객들을 감정적으로 잡아끈다. 휘날리는 색색의 치맛자락에 홀린 것처럼 그들의 사위에 마음이 동한다. 이들은 자신을 감추기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매혹적이고 사랑스러움을 표출하며, 절제 있는 발재간으로 그 느낌을 더욱 부각한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부채는 이 조그만 움직임을 크게 보여준다. 


일곱 명의 여인이 시종일관 미소를 띠며 움직인다. 특별히 고정된 움직임이 없음에도 이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바람처럼 유려하게 잘 흘러간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멈추지 않는다. 이들의 사랑스러움은 움직임에서도 똑똑하게 드러난다. 옥처럼 아름답기만 할까, 이들의 재치 있는 움직임은 그들의 내면까지도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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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춤


세 명의 무용수는 다른 신체를 가졌지만, 이들의 움직임은 하나처럼 움직인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이 깔끔하며 순간의 강렬한 절제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통된 절제와 적절히 살리면서도 채도를 낮춰버린 그들만의 개성은 인형같이 보인다. 


이들의 모든 움직임은 같은 박자를 유지하지 않는다. 움직임의 리듬이 때때로 달라져 보는 재미가 있다. 고결하고 단정하면서도 애달파 보이는 수건은 이들의 손끝에서 그들의 정서를 담아낸다. 국화처럼 고결하면서 순수함을 표방하여 전체적으로 깨끗한 하얀색을 떠올리게 한다. 


살풀이는 우아하게 이루어진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무대에서는 천천히 그들의 모습과 표정,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다. 그 끝에서, 그들이 무엇이 말하고자 하는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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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입춤


시작하는 발걸음이 흥겹고 가볍다. 개구쟁이 바람이 발걸음을 어지럽힌다. 잔망스러운 걸음걸음이 이어지고, 재빠른 움직임은 신명 나게 다가온다. 바닥을 종종 걸어가는 제비처럼 잔뜩 재간을 피우는 걸음이다. 한 손에 수건을 든다. 공중에 여지를 줬다 뺏는다. 가락이 흘러나왔다가 급작스럽게 멈춤으로써 관객들의 집중력을 무섭도록 빨아들인다. 무대의 주인공인 무용수는 초여름의 주인인 것처럼 싱그럽게 무대 위를 뛰논다. 


소고를 손에 쥔 무용수는 여전히 흥겹게 노닌다. 소고를 손에 쥔 순간부터 그녀의 한쪽 손은 소고 채고, 한쪽 손은 소고로 분해 하나의 신체로 자리 잡는다. 소고를 이용한 움직임은 이전보다 더 활기차고 재빠르다. 무대를 넓게 누비며 생동감을 불어넣으면서 미소를 잃지 않는다. 무겁지 않은 소고 소리가 가볍게 음악에 얹히고 맑게 울린다. 수건과 장구, 이외에도 재간 있는 발걸음은 무대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무용수는 수건을 갖고 노니며 무대를 흥미롭게 구성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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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무


금색 저고리를 입은 박재희의 뒤로 어린 제자들이 나열되어있다. 제자들이 박재희를 둘러싸고 앉은 가운데, 박재희는 고요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손짓으로부터 뻗어 나오는 힘은 부드럽고 강하다. 한발, 하나의 움직임에 알맞게 배어든 절제는 태평무의 고풍스러운 미에 꼭 들어맞는다. 연륜에 새겨진 품격이 고급스러우면서 아름다운 태평무를 진중함과 따뜻한 포용력까지 함께 끌어낸다. 


박재희의 움직임 뒤로 제자들의 태평무가 이어진다. 많은 무용수들이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찾아가고, 호쾌하고 신명 나는 사위를 선보인다. 가벼운 발재간이 눈에 띄며, 화려하지만 산만하지 않다. 무용수들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루기에 무대는 높은 집중력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주목시킨다. 


그 가운데 다시 등장한 박재희가 지휘하듯 장엄하게 움직인다. 제자들은 아까와 다르게 그에 맞춰 움직이고, 태평무의 본질을 알맞게 수행한다. 박재희가 그려낸 태평무는 60년이라는 시간이 쌓이며 노련해진 태평무와 지금 전수되고 있는 태평무의 완벽한 어울림을 자아낸다. 이 두 세대의 무대에 사람들은 큰 박수를 보낸다. 이는 단지 태평무라는 한국무용이 아닌 벽파 박재희라는 하나의 장르에 보내는 찬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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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공연이 끝난 후 커튼콜, 무대를 채웠던 많은 사람들이 객석을 향해 인사한다. 무대 중앙으로 박재희를 모시려 할 때, 박재희는 무대의 가장 끝자락에 서서 세대를 이어갈 무용수들에게 인사를 전한다. 고아한 한송이 꽃과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마주보고 고개를 숙인다. 인사에서 느껴지는 존경심과 감사, 벽파 박재희의 전통춤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다. 여기, 이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 

 

박재희는 이화여자대학교 및 同 대학원을 졸업하고, 故한영숙선생으로부터 태평무를 전수받아 소멸될 위기였던 한영숙류 태평무를 전국적으로 보급 및 활성화하였다. ‘태평무’의 전통성을 지켜내면서도 그가 가지고 있는 미의식을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보적인 장르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 결과 국가무형유산 한영숙류 태평무의 초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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