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 빠지니 춤판에 홀딱 미쳤다"
- [김건표의 행복초대석] 월간 ´춤판춤북´ 발행인 이재봉 사진작가
- 전국 흩어진 무용공연 정보 담아 무료 배포 "무용전문 스튜디오도"
글 : 김건표 대경대학 교수, TBC 리얼인터뷰 통 진행
100710 / 데일리안 원문 바로가기
https://www.dailian.co.kr/news/view/211290
무용공연을 한번 본 뒤로 무용사진을 전문적으로 찍기 시작한 이재봉씨.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무용공연 정보를 매월 ´춤판춤북´에 담아 무료로 전국 무용관련 기관단체, 학교, 학원 등 3000여 곳
무용에 미쳐 무용사진만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이재봉 씨(37). 그의 별명은 재봉틀이다. 무용공연을 한번 본 뒤로 그의 인생은 180도 바뀌었다.
그의 직업은 시인 지망생을 거쳐 요리사, 컴퓨터 프로그래머에 이르렀다. 한 가지 더 있다면 사비를 몽땅 털어 무용계 소식을 담아내는 ‘춤판춤북’ 발행인이자 관련 인터넷 사이트 10여개를 운영하는 운영자다.
2010년에 개정된 초등학교 3~4학년 체육교과서에 그가 찍은 사진 6컷이 실렸다. “사진 찍는 일에 죽도록 매달리니까 죽으라는 법은 없데요. 교과서에도 제 사진이 실리고.”
돈이 안 되는 일에 죽도록 매달리며 신들린 사람처럼 무용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살아가는 인생이 즐겁다고 말하는 괴짜 재봉이. “아버지한테 늘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제 이름을 한번 들으면 재봉틀로 바로 기억해 주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그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들어섰다. 이내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어디 계시는데예?” 그의 구수한 사투리에 맞춰 핸드폰이 반사적으로 울려댔다.
한 손으로는 카메라를 움켜쥐고 있었다. 큼지막한 가방은 어깨에 걸려있는 가방 줄이 끊어질 듯 매달려 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고 그를 단박에 알아봤다.
땀을 손수건으로 씩씩하게 훔쳐 대며, “조금 늦었지 예” 한다. “누굴 닮은 것 같습니다” 그가 웃었다. “가수 윤도현을 닮았다고...” 반응이 없자 소리가 커진다. “한마디로 살찐 윤도현이라예.”
그가 앉자마자 들고 있던 종이더미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월간으로 발행하고 있는 ‘춤판춤북’ 책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그는 자비를 털어 무용전문지와 무용 관련 사이트 10여개를 운영하고 있다
“무용을 전공하셨습니까.” 그의 대답이 바로 날아왔다. “아니라 예.”, “그럼?”, “이 놈 때문에...” 그의 시선이 카메라를 향한다.
무용과 전혀 인연이 없던 그였다. 사진 하나로 무용과 인연을 맺게 됐다. 한국무용, 현대무용, 발레 등 가릴 것 없이 무용공연이 있는 날이면 그는 카메라를 메고 어김없이 공연장을 향한다. 돈이 안 되는 것은 뭐든 안 가리고 다하는 것이 그의 특기가 된지 오래다.
그것도 부족해 결혼하면 쓰려고 조금씩 모아둔 통장잔고를 몽땅 털어 ‘춤판춤북’ 발행인이 됐다. 주변에서는 미쳤다고 수근 거렸다. 하지만 재봉이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
그는 더욱더 무용 사진을 찍고 편집하는 일에 매달렸다. 무용공연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공연장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다.
곧장 집으로 달려와 컴퓨터를 켜고 사진 편집을 하면서 글을 달고 전국팔도에서 일어나는 무용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춤판춤북’을 만들었다.
1000부로 시작해 현재는 3000부를 발행한다. 제작비용이 월 500여만 원이 들지만 다 자비로 해결한다. 무용 관련 인터넷 사이트도 10여개를 개설했다. 그 중 하나인 ‘춤판닷컴(chumpan.com)’에서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무용소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해 놨다. 좋아서 매달렸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인을 꿈꿨다. 그가 책한 권을 내려놓는다. “뭡니까?” “제가 그동안 쓴 시 입니다. 부끄러운데...,”
300여 페이지 분량에 담긴 500여 편의 ‘시’는 세상을 향해 날지 못하고 그의 마음속에 멈춰 있었다. 그의 시는 공모전에는 특별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시인으로서 살아 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그는 마음을 틀었다.
“오래도록 벼르다가 카메라 한 대를 질렀습니다. ‘룰루랄라’거리며 전국 축제를 다 찾아다녔어요. 그런데 축제공연에 현대무용을 봤는데 저도 모르게 손끝이 셔터를 누르고 있더라고요. 압도되는 느낌... 무용에 홀딱 반했어요. 그 뒤로는 무용사진만 찍고 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요리를 하다. 컴퓨터 일을 하던 중에 가야산으로 등산을 갔었다. 그곳에서 놀고 있는 꼬마 한 명을 우연하게 마주친 것이 그의 인생 향로를 바꿔 놨다.
“꼬맹이 한명이 계곡에서 물을 퍼 흙으로 성을 쌓고 노는 겁니다. 참 예쁘데요. 그래서 사진 몇 컷을 찍고 다시 등산을 하고 내려오는데 그 녀석이 보고 싶은 거예요. 인연인거죠. 동네에서 그 녀석하고 신나게 놀았어요. 사진도 찍어주고요.”
그때 만난 동네 꼬마가 잊힐 무렵, 컴퓨터자격증 강좌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던 그의 홈페이지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그녀석이 글을 남겨 놓은 겁니다. 가야산 해인사 근처에서 부모님이 여관을 운영하시는데 보고 싶다고 놀러 오라고 말이죠.”
그는 무용사진만 미친 듯이 5년 정도 찍고 다녔다. 주변에선 이제 ‘재봉이가 있어야 무용공연이 산다’는 얘기가 돈다
“그렇게 다시 찾은 꼬마하고 인연이 됐어요. 해인사로 달려가서 그의 부모님하고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게 저한테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그 꼬마 아버지하고는 형님 동생하면서 지냈죠.”
하는 일 마다 풀리지 않았다. 다니던 회사는 문을 닫았고 그가 개설해둔 컴퓨터 관련 사이트도 신통치 않았다. 수중에 있던 돈은 바닥이 났다. 버스도 간신히 타고 다닐 정도가 됐다. 그래서 스님이 될까 고민도 해봤다.
“흔히 들을 수 있는 ‘힘들어 죽겠다’는 말이 처음으로 와 닿았습니다. 한마디로 빈털터리, 알거지가 된 겁니다.”
쫄딱 망하자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때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해인사에 있던 꼬마와 형님, 그리고 ‘해인장여관’ 이었다.
“진짜로 죽으라는 법은 없는 것 같아요. 꼬마 아버지가 여관방 하나를 덜컥 내주시는데 억수로 감사했습니다. 남은 재산은 컴퓨터 두 대가 전부였어요.”
“여관방에 책상과 컴퓨터 2대를 놓고 해인사 인근에 사는 학생들 컴퓨터 공부시켰어요. 당시에는 워드 자격증 바람이 불어서 신나게 가르치면서 지내니 살 것 같았습니다.”
그의 컴퓨터 기술은 동네에 소문이 났다. 학생들이 하나 둘 몰려오고 인근 학교까지 잘 가르친다는 입소문이 퍼졌다. 돈이 조금 모아지자 그는 중고 카메라 한 대를 구입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다시 무용공연을 찍으러 다녔다.
“무용공연을 촬영하고 사진을 보면 기가 막힌 겁니다. 제가 잘 찍은 게 아니고 무용하시는 분들한테 감탄을 한 거죠. 그래서 주인한테 구경이라도 시켜줘야 예의가 아닌가 싶어서 들어와서 무용사진 실컷 보시고 가시라고 홈페이지를 차렸어요.”
그리고는 미친 듯이 무용공연만을 찍으러 다녔다.
“제가 무용계통을 잘 모르잖아요. 무용 쪽 일을 하시는 분들을 수소문해서 찾아다녔어요. 교수, 연출가, 전문무용단들, 공연장 가리지 않고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촬영해서 보여드리니 주변에서 ‘아하 이놈 봐라 참 희한하게 무용사진 잘 찍네’하는 겁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무용관계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수중에 돈은 없어도 마음은 행복했다. “사진 찍는 게 억수로 재밌데요. 마음이 행복해 지니까 돈 생각은 안하게 되더라고요.”
무용사진만 전문으로 미친 듯이 5년 정도 찍고 다니자 주변에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재봉이가 있어야 무용공연이 산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는 우리나라의 무용계의 여건이 좋아져서 그야말로 안무자는 안무만하고 무용수는 춤만 출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는 신이 났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무용공연정보를 담아 무료로 배포했다. 그렇게 5년 동안 셔터를 누르고 미친 듯이 버티자 어느새 그는 이 분야에서는 최고의 전문가가 돼있었다. 그가 찍은 무용사진만 100만 컷에 달했다.
“제가 촬영한 것 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은...(생각) 100장도 됩니다.”
“사진을 촬영하는 것 보다 선택하는 과정이 더 힘들군요?”
“기준이 엄격해야 합니다. 사진촬영 나가면 3000~4000장 정도 찍고 오는데 제가 최종적으로 선택해서 사진 주인공한테 전해드리는 것은 70장도 됩니다. 평균 40장 내외입니다. 억수로 재수가 좋으면 더 되고요.”
그가 운영하는 사진, 무용, 디자인, 공연 정보를 관련 사이트만 10개 여가 된다. 특히 워드강좌와 한자 교재를 볼 수 있는 사이트(day55.com)는 하루 방문객이 30만 명이 넘는다. 사이트를 운영해서 수중으로 조금 들어오는 돈은 다시 ‘춤판춤북’을 발행하는데 다 털어 넣는다.
“이제는 돈이 좀 들어옵니까?” 그가 웃는다.
“일에 묻혀 지냅니다. 그게 좋고 그것이 행복인데...돈이 없더라도 다 투자라고 생각합니다. 가늘고 길게 갈 겁니다. 사이트 운영해서 한 달에 400만~500만 원 정도 들어오는데 무용에 다시 투자하는 겁니다.”
그는 3개월 전에 조금씩 모아둔 사비를 털었다. 무용가들을 위해 프로필 사진도 전문적으로 촬영할 수 있도록 스튜디오를 꾸미고 싶었다. 월세 40만 원 정도 낼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고 직원도 2명 채용했다.
“막상 사무실을 얻고 직원을 채용하니까 월급을 줘야 하는 게 털컥 겁이 나데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습니다. 죽으라는 법은 정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앞으로 무용만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컴퓨터 몇 대와 사무 책상 몇 개가 그의 사무실을 지키지만 그는 여전히 행복하다.
“앞으로 무용만 전문적으로 촬영하는 스튜디오로 꾸밀 겁니다.”
“돈 들잖아요?”
“아하, 다 됩니다. 천장에 조명을 달고 벽면에는 다양한 배경을 집어넣어서 그럴싸한 스튜디오로 반드시 만들 겁니다.”
“그래서 좋은 무용가들 프로필 사진 찍어서 소개하고 그분이 잘 되면 제가 잘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 무용가들을 존경합니다.”
“돈도 벌지 못하고 무용사진에 미쳤다는 얘기를 들어도 행복해요?”
“제가 무용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공연을 보면 감탄스럽습니다. 한국무용은 정적입니다. 느린듯하지만 그 안에는 빠르고 살아있는 클라이막스의 정점이 보입니다.”
“장단에 맞춰 움직이면서 무용수의 손이 천천히 펼쳐지면 그 춤사위에 저도 전율을 느낍니다. 제게 말을 하는 느낌입니다.”
“몸짓으로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까?”
그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감동을 주는 몸짓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감동을 전하지 못하는 몸짓을 보면 참 난해하다는 생각을 해요. 뭘 의미하는지 모르겠어요. 젊은 사람들이 안무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객관화되지 못할 때 안타깝죠. 스토리가 있고 그 얘기를 몸으로, 마음으로 전해줘야 감동이 생깁니다.”
“일부 사진작가들은 국선에 출품해 상을 받는데 욕심을 부리죠.”
“한국사진작가협회 주최 대전에 출품해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회의가 들더군요. 이미 대상은 정해져 있잖아요. 뉴스에도 보도가 된 사실이구요. 논란의 여지는 있는 겁니다. 예술작품이 주관적이잖아요. 운도 따라야 하구요. 앞으론 국선에 제 사진을 출품해 볼 생각은 전혀 없고 상금에 욕심도 없어요.”
“제 사진이 예술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가 촬영한 사진을 펼쳐봤다. 사진 한 컷, 한 컷이 무섭고 매서웠다. 몸짓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무용수와 이를 사진에 담아 또 다른 예술로 승화시키는 그. 그 순간만큼은 두 사람이 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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