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무대 위에 담기는 순환과 멈춤 '사계, Still Life'
소울무용단 정기공연
사계, Still Life
2024년 12월 21일 (토) 18:00 / 달성예술극장
- 글 : 최윤정
- 진행/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12월 22일, 눈이 내리는 달성예술극장에는 반짝거리는 전구와 트리가 로비를 장식하고 있다. 관객들은 반가운 얼굴들에 서로 인사하고, 한 해의 마무리를 맞이하여 하나의 결실을 마주 볼 생각에 들떠있었다.
공연 시작 30분 전, 관객들이 하나둘 하우스로 들어오고 이내 객석은 북적북적할 정도로 꽉 채워졌다. 본 공연 15분 전, 무대 한 켠에 소울무용단이 한 해 동안 걸어온 발자취가 재생된다. 땀 흘리는 사람들, 웃으며 움직이는 사람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엄선민 단장. 영상이 종료되고 극장은 파도 소리로 가득 찬다.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파도 소리와 함께 무용수들이 천천히 무대 위로 등장한다.
아주 천천히, 느릿하게 움직이며 바닥에 있는 촛불을 집어 든다. 바람이 불새라 바닥을 딛는 발바닥이 신중하다. 무대의 가장 앞에 촛불을 두고, 장구를 들고서는 제 자리를 찾아간다. 오후 6시, 소울무용단의 2024년 정기 공연의 막이 올랐다.
#겨울
삼도설장구가락
역동적인 움직임은 없다. 그러나 무대는 풍성하며 흥미롭다. 오직 장구의 타악 소리 만이 공간의 모든 소리를 찢고 그 자리에 존재함을 나타낸다. 하나의 장구도 아닌 수십 대의 장구가 한날한시에 소리를 낸다. 천둥치는 소리처럼 공간이 통째로 울린다. 심석현과 엄선민의 주도 아래, 전통춤을 배워가는 아이들이 장단을 가져간다.
둥- 둥- 열채가 둥근 부분으로 북채를 두드리고, 짝짝- 궁채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익숙한 리듬과 낯선 리듬이 번갈아 등장한다. 장구 소리는 이성을 먼저 두드리지 않는다. 신체를 자극하고 심장을 울리며 오롯이 이 무대를 감상할 수 있게 만든다.
두드림
심석현의 모듬북과 임정아의 꽹과리가 합을 이룬다. 이 조합은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이끌어준다. 북소리가 앞설 땐 꽹과리가 리듬을 잡아주고, 꽹과리가 치고 나갈 때는 북소리가 뒤에서 굳건하게 버텨준다.
심벌과 북이 미친 듯이 울리면, 더 높은 소리를 내는 꽹과리가 음악의 균형을 잡는다. 심벌과 북을 합쳐놓은 모듬북, 그리고 꽹과리의 조합은 익숙하지 않지만, 그 소리만으로 흥이 솟구친다. 휘몰아치는 연주와 악기 소리가 관객의 마음을 후비고 들어왔다.
#봄
겨울꽃
꽃을 든 아이들이 무대의 사방에서 진입한다. 아직 꽃내음이 무르익지도 않은 소담한 꽃들은 세상에 나오는 것이 익숙지 않아 보인다. 따뜻한 햇살 아래 더 넓은 세상을 가져다줄 봄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쌓였던 눈은 속도 모르고 녹아간다. 꽃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직 가지 않은 겨울을 만끽한다.
그러나 헤어짐의 시간은 다가오고, 꽃은 서서히 다른 계절을 향한 만개를 준비한다. 겨울을 떠나보내 줘야 하지만, 미련이 남는다. 곧이어 무대는 봄을 이끌고 들어온다. 어린 꽃들은 봄을 반가워하지만, 겨울을 마주한 곳을 떠나기 싫어하는 마음이 공존한다. 이내 무대에 완연한 봄이 들어서면, 꽃들은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간다. 겨울의 해가 저물었다.
황희연류 흘림
세 사람이 봄을 몰고 등장한다.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듯, 정초의 기운을 물씬 풍기는 세 사람의 치마가 한껏 나풀거리는 게 인상적이다. 살랑살랑한 봄바람을 타고 꽃잎이 여행하듯, 모든 무대를 밟는 동선이 크고 화려하다.
꽃잎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새로이 나선 세상의 모든 것을 구경할 심산인 것처럼, 그들이 내뿜는 에너지는 활기차고 밝기만 하다. 무대 위로 꽃내음이 나돈다. 봄의 시작이다.
#여름
임이조류 입춤
여러 무용수가 일정한 속도로 같은 동작을 수행한다. 잠시 박자가 비틀어지면, 따로 무리 지어 제각기 동작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일련의 흐름은 튀지 않고 자연스럽다. 물 흐르듯 유려하게 흘러가는 움직임이 하나의 결과를 향해가는 과정의 연속이었고, 관객들은 이를 편안하게 보며 여흥을 즐길 수 있었다.
일사불란한 발디딤에 무대의 좌우가 기울어지고, 손끝까지 가득한 힘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방향을 바꾼다. 한 해 동안 전통을 계승하는데 땀과 시간을 쏟은 젊은이들의 노력이 여실히 드러나 어떻게 성장할지에 대한 기대를 높인다.
배명균류 풀잎
새소리와 계곡 물소리로 시작하는 무대에 풀잎 하나가 날아들었다. 바람 따라 휘몰아치는 부채는 비어 있는 무대를 장식한다. 무용수가 부채를 펼치면 무대 위 에너지가 만개하고, 부채를 접으면 온전히 엄선민의 움직임만이 빛난다.
풀잎이 움직이는 속도는 일정하지 않다. 느렸다가 빨라지고, 서서히 다시금 느려진다.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움직이듯 불규칙한 자연 속에서 함께 움직인다. 그러나 무대 위를 가득 채운 에너지만은 그대로 남아있다.
종착지에 당도한 풀잎이 빠르게, 아주 빠르게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객석은 그 에너지에 압도되어 숨을 죽인다. 강렬한 엔딩을 목도한 객석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힘껏 살아낸 하나의 생명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가을
배명균류 산조
고즈넉한 정자에 앉아 유희를 구경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운 이를 그리는 듯한 애절하고 고달픈 춤사위가 무대를 넘어 관객의 마음을 건드린다. 산수화를 보는 것 같은 풍류에 치마폭이 그림같이 휘날린다.
느릿하고 묵직한 움직임이 멋들어지게 그려진다. 천천히 들어 올려지는 팔은 자연의 순리처럼 자연스러운 몸짓을 드러낸다. 인위적이지도, 무언가를 표현하려 지나치게 애를 쓰지도 않지만, 몸의 움직임에 섭리대로 흘러가는 삶이 투영된다.
Over the moon! -falling-
어딘가 익숙한 멜로디에 맞춰 무용수들은 현란하게 움직인다. 빨간 부채가 시선을 잡아채며 여러 명의 무용수가 칼같이 군무를 이룬다. 현대적이고 창의적인 춤사위가 돋보이면서도 한국무용이 가진 특성을 잃지 않았다.
움직임과 더불어 무대 위 무용수의 재미가 우선시된다. 진정 무대를 즐기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해 움켜쥔다. 조명을 받아 반짝이는 미소에 신명이 더해진다. 8명의 무용수가 진정으로 무대를 즐겼기에, 지켜보는 관객까지 그 감정에 동화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추임새가 더해진다.
정기공연의 마지막 무대답게, 관객과 무대를 모두 하나로 만들며 공연은 막을 내렸다.
#그리고 겨울
무대 직후 이어지는 커튼콜은 단순히 인사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여흥에 이어 관객과의 사진 촬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바로 관객과의 만남을 주도한다.
'사계, Still Life'는 멈춤과 반복되는 순환이라는 뜻을 담은 공연답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삶과 그 안에서 엄선민 단장이 보여주고 싶은 전통과 창작을 담아냈다.
연말을 장식하는 의미이자 정기공연의 의의까지 제대로 잡은 소울무용단의 '사계, Still Life'는 꽉 채운 관객석의 응원과 함성 속에서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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