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으로 노닐었던 아름다운 밤 '대구 전통춤의 밤 - 춤, 노닐다'
- 시간의 결 따라 흘러가는 춤의 서사시
2024 대구전통춤의 밤 '춤, 노닐다'
2024년 10월 26일 (토) 19:00 /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 글 : 김윤정
- 진행/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지난 10월 26일, 봉산문화회관 가온홀에서 열린 <2024 대구전통춤의 밤 ‘춤, 노닐다’>는 전통춤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밤이었다. 대구무용협회가 주최하고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무용가들이 함께한 이번 공연은 명맥을 이어온 대구 전통춤의 선도적 위치를 다시 한번 공고히 하며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한영숙제-박재희류 태평무: 난초 같은 품격, 태평의 서사
- 출연 박정희
고고한 난초의 품격을 엿보는 무대였다. 손끝이 하늘을 가리키면 별들이 숨을 죽였고, 발끝이 땅을 누를 때는 대지가 그 품을 열었다. 몸짓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나라의 태평성대를 꿈꾸는 간절한 기원의 시였다.
춤꾼의 동작은 궁중의 우아함과 민속의 생동감을 모두 담고 있었다. 손끝에서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사위는 마치 한 줄기 빛이 수직으로 내려오듯 절묘했고, 발디딤은 난초처럼 고고하면서도 묵직했다. 장단이 흐를수록 춤은 물결처럼 공간을 메웠고, 관객들은 그 속에서 평온한 숨결을 느꼈다.
임이조류 한량무: 선비의 흥취, 바람 속을 거닐다
- 출연 최석민
두 번째 무대는 바람 속을 걷는 선비의 고독과 흥겨움을 담아낸 춤이었다. 춤꾼은 때로는 바람처럼 자유로웠고, 때로는 그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섬세했다.
선비의 마음을 담은 절제된 어깨춤은 마치 산중의 고요를 그리듯 묵직했고, 발끝에서 터져 나오는 흥겨움은 강물처럼 끝없이 이어졌다. 시나위의 장단에 몸을 맡긴 춤은 구름을 타듯 가볍고, 새벽 안개처럼 아련했다. 선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문이었다.
권명화류 소고춤: 땅의 리듬과 여인의 숨결
- 출연 김미수
권명화류 소고춤에는 땅과 사람, 그리고 삶의 리듬이 담겨 있다. 소고의 장단에 맞춰 춤사위는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손길이 보이고, 타작놀이를 하는 흥겨움이 관객을 끌어들였다.
춤꾼의 동작은 대지를 누비는 바람 같았고, 발사위는 마치 땅을 다지며 삶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반무릎 꺾는 동작에서는 여인의 고운 숨결이 느껴졌고, 덧배기 장단에 맞춰 움직이는 손짓은 바람결에 나부끼는 나뭇가지 같았다. 이 춤은 땅과 삶을 잇는 고리였고, 관객들은 그 고리 속에서 생동감을 느꼈으리라.
문진수류 진쇠춤: 쇠소리로 쫓아낸 액운의 울림
- 출연 박진미
쇠의 영혼으로 빚어진 몸짓이었다. 쇠 연주와 함께 시작된 춤은 대지의 액운을 몰아내는 주문과 같았다. 무대 위의 춤사위는 마치 폭풍우 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장면을 보는 듯 강렬했다.
허튼짓과 채발림의 조화는 물결처럼 부드러웠으나, 그 속에는 쇠의 강인함이 녹아 있었다. 춤이 빠르게 몰아칠수록 공간은 에너지로 가득 찼고, 정화되는 기운이 객석으로 번졌다.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춤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체험을 한 듯하다.
성윤선 作 노랫가락장고춤: 장고 가락에 실린 흥겨운 서정
- 출연 조연우
노랫가락장고춤은 춤과 음악이 빚어낸 흥겨운 서정시였다. 경기민요 창부타령의 구성진 가락에 맞춘 춤사위는 마치 푸른 언덕 위를 뛰노는 사슴 같았다.
춤꾼의 발림 동작은 장고와 완벽히 맞아떨어지며 리듬의 파도를 만들어냈고,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동작은 바람결에 흩날리는 꽃잎 같았다. 장고 소리에 실린 춤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경쾌했고, 관객들의 마음에도 흥겨움이 퍼져나갔다.
강성민 안무 보렴화무: 연꽃이 피어나는 춤사위
- 출연 이선경
보렴화무(報念花舞)는 벽사의 염원과 세상을 향한 축원의 마음이 연꽃처럼 피어나 무대 위를 물들였다. 염원은 장삼을 매개로 확장되어 하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되어 번져갔고, 내딛는 걸음은 대지를 품은 마음을 전하는 듯했다. 춤사위가 만들어내는 고요한 파동은 관객들의 마음을 두드리며 인간과 자연, 그리고 세상의 조화를 노래했다.
승무 춤사위에서 느껴지는 고요한 열정은 무대에 신비로움을 더했고, 춤이 끝날 무렵에는 마치 연꽃 향기가 객석까지 퍼져나가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보렴화무는 세상과 인간,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담아낸 염원의 노래였다.
현학무: 검은 학의 날갯짓 속으로
- 출연 노현식
현학무는 오래된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낸 동화(動畵)였다. 거문고의 깊은 울림과 함께, 춤꾼은 부채를 손에 들고 무대를 누비며 선비의 고고한 품격을 그려냈다.
부채를 펼칠 때마다 학의 날갯짓처럼 공간은 확장되었고, 접을 때마다 고요가 찾아왔다. 부채와 옷자락의 움직임에서 학의 자유로움과 선비의 절제된 마음을 볼 수 있었다. 거문고 줄을 튕기는 듯한 춤사위는 관객들에게 자연과 인간이 어우러지는 초월적 순간을 느끼게 했다.
부채가 하늘을 향할 때는 학이 날아오르는 희열이, 땅을 스칠 때는 선비의 깊은 사색이 느껴졌다. 하늘과 땅,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엿보며 고요한 학의 날갯짓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인간과 자연이 교감하는 예술적 공간을 창조한 무대였다.
‘대구 전통춤의 밤’은 춤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각 작품은 하나의 시였고, 서사시였으며, 철학이었다. 춤을 통해 전통의 힘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이 밤은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춤으로 노닐었던 밤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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