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는 이상, 그 사이 환상 '인코리아국제무용제'
인코리아국제무용제
2024년 8월 17일 (토) 오후 6시 / 달성예술극장
- 글 : 최윤정
- 진행/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지난 8월 17일, 달성예술극장에서는 국적에 국한되지 않는 무대를 접할 수 있는 ‘인코리아국제무용제’가 상연되었다. 공연장에는 이국적인 음악이 흘러나왔고, 객석엔 보기 드물게 많은 카메라가 자리잡고 있었다. 무용수들은 수십 대의 카메라 렌즈 앞에서 땀의 노력으로 일궈낸 자신들의 움직임을 선보였다. 다른 나라의 문화가 재해석되며 선보여진 공연이 그날, 무대에서 발아하였다.
그리움, 향수, 희망을 이야기하는 낭만 ‘caiwei 채미’
choreography 순과 / cast 곽연
불이 켜지고 보이는 무용수는 분홍색의 기다란 소매를 꼭 말아쥐고 있다. 한 송이 꽃 같아 보이기도 했던 그것은, 이내 허공으로 나부끼며 한순간에 무대를 환상과 현실의 경계로 이끈다. 살랑거리는 움직임은 선이 여리면서도 몸의 유연함을 극대화해 보여 준다. 이국적인 멜로디와 언어는 초점이 다른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어 긴 소매와 신체가 어우러져 공중에 호선을 그리는 움직임은 낭만적이고 몽환적이다. 한편의 환상 같은 느낌을 강화한다.
‘채미’는 중국 전통 민요로 과거의 침략과 전쟁, 그 사이에서 가족을 잃은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알고 다시금 무대를 상기하면 느낌은 완전히 달라진다. 사전지식 없이 무대만 놓고 보았을 때 한 여인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면, ‘채미’가 무엇인지 알고 난 후에 느껴진 움직임은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그 속에서 낭만을 꿈꾸는 여인처럼 느껴졌다. 중국 민요에 현대적 미학을 접목하여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움직임은 존경과 그리움 향수를 담아낸다. 그녀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 시대의 낭만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차가운 소리와 뜨거운 움직임의 000 ‘국가무형유산 진주검무’
choreography 송임숙, 송선숙 / cast 장현진
느리고 여유롭다. 단 한 순간도 절제와 품위를 잃지 않는 춤사위를 선보인다. 발끝엔 흔들림이 없고 손끝은 견고하게 힘이 유지된다. 한발, 한 발 내딛는 발끝 가득 절제가 있다. 오색이 가득 담긴 한삼을 벗어 던지고는 절도있게 움직임을 이어 나간다. 마치 한 편의 무술 같기도 하다. 장단 변화에 맞춰 집어 든 칼은 차가운 금속 특유의 느낌으로 무대의 분위기가 한순간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무용수의 여유가 잔뜩 묻어나는 부드러운 움직임과 조화를 이룬다.
진주검무의 칼은 다른 검무와 달리 목이 꺾이지 않는 칼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손목이 크게 돌아야 박력 있고 힘찬 칼사위를 표현할 수 있다. 하나로 단단하게 이어져 있는 검은 딱딱한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오히려 기개와 절제가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꾸준하고 근엄하게 꾸려가는 무대는 우아하고 화려하다. 칼이 신나게 허공을 가른다. 그 칼의 주인은 정중하게 발을 놀린다. 공연이 진행될수록 진주검무 본연의 색이 뚜렷해진다. 치마의 색만큼이나 뚜렷해진 무대는 절제된 매력을 가득 담은 채 마무리된다. 현존하는 국가무형유산 중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춤이라 평 받는 진주검무의 색은 화려했다.
부정, 공격, 피해자와 가해자의 뒤바뀜 ‘DARVO'
choreography 한재영 / cast 이윤주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바깥세상을 탐하면서도 스스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기괴할 정도로 발작하는 그녀를 세상으로 꺼낸 건 호의가 아닌 타인의 폭력이다. 이제 그녀를 가둔 건 부술 수 없는 껍데기가 아니라 자신을 묶고 가두는 사람의 억압과 구속이다. 부정하고, 공격하고, 위치가 뒤바뀐다. 폭력을 가했던 사람은 무자비한 폭력과 억압에 노출되고, 피해자였던 사람은 무표정하게 그 현장을 지켜본다. 부조리의 반복이다. 쓰러진다. 힘겹게 일어서고, 다시 쓰러진다. 두 발을 딛은 채 온전히 걸을 수 없다. 스스로를 감춘다. 버텨내기 위함이다. 기괴하게 몸을 비튼다. 숨이 멎는다. 발작이 시작된다. 그 순간, 위치가 뒤바뀌었다.
가해자의 폭력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신체에서 그치지 않는다. 피해자의 정신까지 갉아먹어 종전에는 완전히 무력화시킨다. 결핍에서 기인한 집착은 폭력이 되어 서로를 구속하고 옭아맨다. 폭력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위치에 따른 억압이 동반될 뿐이다. 위에서 억누르고, 아래에서 잡아끈다.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 서로를 향한 집착은 개인을 좀먹는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겨룰 것도 없이 뒤섞인다. 명확한 가해자도, 피해자도 남지 않았다. 상처받은 사람들만 존재할 뿐이다.
발 없는 여행자의 끝없는 여정 ‘Journey of the wind'
choreography/cast 곽연
밝고 경쾌한 멜로디가 흘러나오고, 하얀 옷을 입은 무용수가 가벼운 몸짓으로 날아든다. 소담하고 담백한 움직임이 가볍게 공기를 흐트러뜨린다. 민들레 홀씨 같이 바람을 타고 들어와 자유로이 무대를 누빈다. 초여름의 늦은 밤, 선선한 밤공기를 싣고 쉬어가는 바람처럼 무용수의 움직임은 자유롭고, 기분 좋은 가벼움을 선사한다. 바람은 발이 없다. 때문에 어디로든, 어디까지나 갈 수 있다. 어디에나 존재하고, 영원토록 달릴 수 있기에 바람의 여행은 아무 걱정 없이 가볍다.
여행은 '쉼'이라는 명목하에 모두의 꿈이자 목표로 일컬어진다. 사람들은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도전하며, 비로소 자신을 찾아간다. 바람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렇기에 바람의 모든 행보는 여행이다. 자유로우며 막힘없이 흘러간다. 희망과 빛이 드리우며, 발 딛는 곳마다 막힘없이 흘러가는 삶을 원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대변한다. 풍성한 하얀 치마는 회전함에 따라 한껏 풍성해진다. 하얀 그녀의 의상처럼, 미래는 어떤 색이든 될 수 있고, 무슨 색이든 밝게 빛날 것임을 보여주는 무대는 바람처럼 가볍게 마침표를 찍었다.
내가 생각하는, 네가 생각하는 본질 ‘in'
choreography 이시연 / cast 이희주, 김보경, 조미희
팔을 들고, 다리를 뻗는다. 발을 주축으로 회전하고, 손끝까지 힘을 유지한다. 가장 태초에서 기인하는 움직임이 이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본질‘이다. 움직임에 충실하고, 적절하게 분배된 힘이 무대를 촘촘하게 채운다. 세 명의 무용수가 계산된 움직임을 정직하고 정확하게 소화한다. 두면, 혹은 세 명씩 균형을 맞추어 무대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한다. 극적으로 바뀌는 노래에 따라 이들의 움직임과 동선도 극적으로 변화한다. 오로지 신체만을 이용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 곡선을 이루는 움직임으로 발레의 우아함을 극대화한다. 그들이 정해놓은 서사가 아닌, 움직임의 본질에 집중한 무대 ’in’이다.
사전적 정의의 '본질'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사물 자체의 성질이나 모습을 뜻한다. 이 무대는 자신, 혹은 타인의 유기적인 연결을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는 과정이 무용뿐 아니라 개인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표현한다. '나'의 내면을 파고들어 무성의 언어, 움직임에 이른다. 형식적인 말과 달리 고정된 형태가 없어 자유롭고 무한하다. 이 언어로 이들은 자신, 무용, 삶에 대한 본질을 시각화한다. 개인이 가지는 본질은 모두 다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고찰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본질에 한발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자신의 움직임을 선보이고 있는 외국 무용수들과 함께한 '인코리아국제무용제'는 서로의 무용을 나누는 자리였다. 움직임이 언어가 된 무대는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말보다 훨씬 많은 대화가 오갔다. 다정하게 다가오는 언어도 있었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언어 또한 존재했다. 무형의 언어는 쏟아내고, 표현된다. 그 표현 속에서 우리는 그들이 바라는 이상을 볼 수 있고, 그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환상 또한 느낄 수 있다. 한국을 사랑하는 이들이, 한국에서 더 많은 성장을 겪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깃든 '인코리아국제무용제'가 다음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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