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과 도전, 전통이 한데 묶인 화합의 장 '2024 대구국제무용제'
2024 대구국제무용제
2024년 9월 11일 (수) 오후 7시 30분 /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 글 : 최윤정
- 진행/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지난 9월 11일,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에서는 '2024 대구국제무용제'의 막이 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품고 있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이었으나, 외국인 관객들이 꽤 많이 공연장을 찾은 것이 약간의 다른 점이었다. 관객들은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며 기대감을 드러냈고, 프로그램북을 보며 다른 나라의 무대에 대한 호기심 또한 반짝였다. 평소에 접하기 어려웠던 타국의 무용과 문화에 대한 궁금증에 하우스가 북적거릴 무렵, 공연장에는 째깍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Polish Dance Theatre <45>
육체의 美(미), 표현의 자유 - 폴란드 <45>
- Polish Dance Theatre
- 안무 Jacek Przyby□owicz
공연의 시작은 아직 정식 공연 시작 시각이 아닌 5분 전부터 시작된다. 관객들은 하우스에 입장할 때부터 시계의 째깍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고, 이내 그것에 익숙해져 일행들과 대화하거나 각자 할 일을 이어 나간다. 시계 초침 소리가 계속되고 공연 시작 5분 전, 무대 위에 한 무용수가 걸어 나온다. 객석 등이 꺼지지 않아 환한 공연장 안, 무대 위로 천천히, 한 명씩 무용수들이 등장해 아주 느리게 일자로 도열한다. 마침내 공연 시작 시간이 되고, 멈춰있던 무대는 그 정적을 천천히 흐트러뜨린다.
공연에서 접할 수 있는 가장 첫 번째 정보는 무용수들의 이름이다. 각각의 움직임을 선보이며 알려지는 무용수들의 이름은, 이 무대에서 도구도, 무언의 언어를 표현하는 매개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것임을 선포한다. 이들의 몸짓은 '인간'이라는 개념 그대로 존재한다. 15명의 무용수가 한 몸인 것처럼 이어지고, 분절한다. 하나의 장면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생명체로 분한다. 장면을 끊어내는 커다란 굉음에 동물적으로 반응한다. 그 소리는 장면과 장면을 분할하고, 새로운 서사로의 전환으로 작용한다.
섞이고, 단합한다. 이들은 움직임을 표현한다. 이들이 몸담아왔던 단체와 그 정체성을 특정한 단어나 문장이 아닌 개인의 움직임으로 드러낸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은 한 폭의 그림 같기도 하고, 조각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의 팔과 다리가, 얼굴과 목이 뒤엉키는 것은 움직임으로 인해 생겨난 서사와 이야기는 몸으로만 표현된다. 전형적이지 않기에 매료되고, 둔탁한 리듬으로 집중을 한 곳에 그러모은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유연하게 흘러간다. 45년을 넘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바로 여기 있었다.
MW Dance Theatre LTD <Unseen Sadness>
보이지 않아도 흘러가는 것 - 중국 <Unseen Sadness>
- MW Dance Theatre LTD
- 안무 Wen Chuan
소년의 내면과 외부 현실 세계에 대한 시선이 공존한다. 소년은 내면의 수많은 자신에게서 억압받고 타인으로부터 외면당한다. 그 과정에서 느끼는 건 철저한 고립이다. 소년은 무력감에 몸부림친다. 소년의 몸부림에 내면을 구성하는 다른 인물들은 소년이 느끼는 고립과 고독을 확장한다. 움직임을 달리하면서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고, 그를 소외시키고는 다른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내면을 구성하는 또 다른 '나'를 직시하면, 외로워진다. 현실에서 하지 못한 일들이 내면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각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것을 마음껏 표출해 내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결국 소년에게로 향한다. 하얀색 조명과 앰버 조명을 오가며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수도 없이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전진한다. 무력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에 대한 확신을 잃을 뿐이다. 나아가려 하는 길은 모두 막혔다. 아무리 부딪혀도 나갈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길을 잃었다. 외부로 나아가려 했지만 갇혀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곳, 고요한 세상에서 소년의 말이 희미해진다.
우울증을 가진 사람의 내면은 무수히 많은 '나'로 이루어져 있다. 어느 순간 이 공간은 한 소년의 마음이며, 어느 순간은 이 소년을 우울하게 만드는 상황이 펼쳐진다. 소년은 외부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내부로부터는 무엇이 자신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황까지 초래된다. 나는 누구인가, 이 비좁은 내면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가. 외부로 다시 연결될 수 있는가. 소리 없이 손을 흔들어 본다. 언젠가 이 작은 네모에서 탈출할 날을 기다리며.
계명무용단 <김백봉류 부채춤>
한 폭의 부채로 그려내는 전통 무대 - 한국 <김백봉류 부채춤>
- 계명무용단
- 원작 김백봉 / 재안무 김현태
무대의 양 끝에서 느릿하게, 재간 있는 발걸음이 교차하며 화려하게 등장한 순식간에 규칙적인 배열을 찾고는 맞부딪히는 순간 부채가 활짝 피어난다. 여유가 가득하면서도 빠르게 모양을 만들고 규칙을 찾아낸다. 위아래로 살랑이는 부채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꽃처럼 부드럽고 생기 있다. 사방에 부채가 퍼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대열 사이로 들어오는 무용수는 고즈넉하게 그사이를 거닌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진한 분홍색의 치맛자락이 화려하다. 부채가 접었다 펴지며 순식간에 작은 꽃들이 만개하는 듯한 착각이 인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눈으로 좇다 보면 모든 순간이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단은 크게 바뀌는 것 같지 않지만, 순간순간 박자가 빨라졌다가 다시 제 박자를 되찾아 분위기가 고루하지 않게 변화를 야기한다.
꽃을 맴도는 한 여인의 여유로운 몸짓은 이 꽃들의 수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김백봉류 부채춤은 운치 어린 부채의 움직임을 마치 연꽃이 물결 따라 춤을 추는 듯한 멋을 펼쳐가는 작품이다. 강하지 않은 몸짓으로 여인의 미를 구사하고 농도가 짙은 색의 옷으로 한복의 미까지 챙긴, 한 폭의 민속화가 담긴 무대였다.
Human Body Expression <BODY>
다른 언어 같은 의미, 같은 언어 다른 의미 - 캐나다 <BODY>
- Human Body Expression
- 안무 길현아
런웨이처럼 걸어 나온 사람들은 각자의 말을 폭력적으로 쏟아내고는 멈추기를 반복한다. 모두의 언어는 다른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간헐적으로 전해지는 단어마저도 각자의 개성을 뚜렷하게 담고 있다. 폭죽처럼 터지는 가지각색의 언어는 화려하게 무대를 수놓는다. 레트로한 음악은 이들의 색채를 더 뚜렷하게 해주고, 이들은 각자의 언어를, 또는 단체로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 강한 조명이 터지며 그들의 언어는 순간의 실루엣으로 남고, 그들의 언어는 흑백과 색채를 오간다.
한 사람의 언어를 모두가 따라 한다. 그리고 모두에게 외면당한다. 관심과 외면이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현시대처럼, 그의 말은 기억되었다가 잊혀버린다. '안녕'이라 말하는 손짓은 모두가 동일하다. 그러나 이런 공통된 행동을 제외하고는 저 움직임들의 온전한 뜻을 알아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움직임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된다. 똑같이 동작을 따라 하기도 하고, 앞선 움직임의 파동에 다른 움직임을 취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몸짓은 표현이 되고 소통이 된다.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이 다르고, 내뱉는 언어가 다르다. 이들 사이에서 공통으로 통하는 것은 움직임이다. 악수하거나, 물을 마시거나, 손으로 저 멀리 가르치는 모션으로 이루어진 움직임. 한 사람씩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 잘 모르는 언어더라도 그 사람의 요구와 욕망을 받아들일 수 있다. '움직임'이라는 행위는 정확한 개념이나 단어로 나타나지 않기에 그 의미가 보는 사람마다 변질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최선을 다해 온몸으로 말하고 있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K-Arts Ballet <Le Baiser(The kiss)>
생명을 갈구하는 원초적인 본능 - 한국 <Le Baiser(The kiss)>
- K-Arts Ballet
- 안무 김용걸
현란한 타악소리와 함께 중앙에 도열 된 무리가 서성거린다. 죽어버린 것처럼 아무런 생기 없이 서 있던 그들의 사이로 생명력 가득한 두 남녀가 뛰쳐나온다. 정열적이다 못해 원시적인 느낌을 품고 있는 거친 움직임은 본능적으로 강한 생명을 갈구한다. 거울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들 안에 내재한 욕망처럼 보이기도 하는 자아들은 무서울 정도로 폭력적이게 관객들을 자극한다.
남자의 욕망과 여자의 욕망은 같으면서도 다른 모션을 취한다. 온전히 두 사람만의 시간임에도 둘만의 시간이라고 느낄 수 없는 무대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정열적인지 보여준다. 매 순간 강렬하게 몰아치는 음악과 조명은 두 사람이 서로를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아는 매 순간 격동한다. 혼란한 주인의 마음을 대신하고, 행복한 주인의 마음마저 격정적으로 반응한다. 이들의 기분과 열정은 원초적이며 정제되어 표현되지 않는다. 이성 관계에 따른 두 사람의 내재된 자아들은 혼란스러움과 본능, 감각을 가감 없이 드러난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영감을 얻어 창작된 이 발레 무대는 생명에 대한 원초적인 갈망을 담고 있다. 생명이 만연하는 계절 봄에 사람의 감정 또한 한계 없이 자라 서로를 본능적으로 갈망한다. 이 무대에서 '봄'은 마냥 새싹이 움트고 햇살이 따사롭게 비치는 시작의 계절이라고만 표현되지 않는다. 인생을 뒤흔들어놓을 정도로 충격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이 움튼다. 사람의 본능은 억누른다고 억제되지 않듯, 이 무대에서 표현되는 움직임들 또한 억눌림 없이 터져 올랐다. 마음과 머리를 망치로 두드린 처럼것 폭발하는 무대에서 봄은 한 인간의 새로운 시작을 뜻했다.
제26회 대구국제무용제에는 폴란드, 중국, 한국, 캐나다 총 4개의 참여무용단을 초청하여 각국의 개성이 뚜렷한 공연이 구성되었다. 변인숙 대한무용협회대구광역시지회장은 "한국과 더불어 폴란드, 중국, 캐나다의 수준 높은 작품으로 무용예술 흐름을 파악하고, 전망을 예측하여 더욱 발전시킬 기호가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라며 2024 대구국제무용제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 각국에서 초청된 무용단들의 실험적이고 언어의 재해석을 표현한 무대는 26년 동안 위상을 지키는 대구국제무용제의 미래가 더욱 기대되는 자리로 빛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