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얀 꽃길 위에 그리운 님을 그리는 몸짓 ‘달구벌 體·짓 꽃이 된 동수氏’
박진미무용단 기획공연
달구벌 體·짓 - 꽃이 된 동수 씨
2024년 03월 23일 /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 글 : 최윤정
- 진행/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누군가 기다리는 걸 아는 듯, 갑작스럽게 따뜻해진 3월 23일 봉산아트센터 가온홀에서는 ‘달구벌 體·짓 꽃이 된 동수氏’이 열렸다. 안무가 박진미가 자신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그리워하며 만든 공연은 많은 관객들이 함께했고, 그녀가 만든 길 위로 많은 사람들이 동행했다. 처절하고 애절하지만, 그녀의 몸짓은 온전히 씁쓸하고 고독했던 한 사람에게로 쏟아진다. 외로운 기타 선율이 공간을 채우면, 둥근 달을 품에 안은 사람이 나타나 본격적인 공연의 시작을 알린다.
커다랗고 하얀, 조명을 받아 빛나는 구(毬)는 달덩이라는 말이 가장 적합하다. 하늘 높이 솟은 달덩이에는 아버지 ‘박동수’씨의 사진이 차례차례 비친다. 가장 뜨겁던 시절부터, 기억의 가장 최근이었을 모습까지. 무대의 주인공임을 공표하는 것처럼 무대 중앙에 위치한 사진은 무대의 끝까지 그의 모습을 관객들이 가지고 갈 수 있게 해준다.
그리운 아버지의 옷을 걸치고는 춤에 미쳐 사는 그녀가 준비한 제사가 시작된다. 날카롭게 공간을 찢어내는 가야금 소리가 음산하게 공간을 가득 채우면 청신(신을 부르다)의 시간이 시작된다. 하얀 옷을 입은 그녀들은 동수 씨를 부르기 위해 스스로를 피워낸다. 그녀들이 형상화한 꽃은 각기 봉우리를 틔울 듯 말 듯 하다가 이내 한 송이의 거대한 꽃으로 화려하게 피어난다. 가야금 소리가 시간을 재촉하듯 빨라지고, 넋을 불러내는 그녀들의 몸짓도 빨라진다.
‘청신-오신-송신’의 형태를 바탕으로 무용단의 독창적인 해석이 가미된 공연은 박진미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현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아버지를 표방한다. ‘청신’의 과정에서 무대로 소환된 ‘아버지’는 정장 재킷 하나 제대로 입지 못한 채 세상을 배회한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아버지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서 한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내디딘다. 박진미는 주저앉으면서도 다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한 송이의 꿋꿋한 꽃으로 표했다.
이 공연의 중심이 되는 행위 ‘고푸리’는 베를 묶어냈다, 풀어내고 다시 엮었다 풀어낸다. 망자의 한을 베에 담아 풀었다 담아내며, 망자의 넋을 기린다. 연속되는 매듭은 굵고 투박하게 공간을 강타한다. 넋을 인도하듯 길을 닦아내는 그녀들은 앞서가기도 하고, 뒤돌아 천을 어루만지기도 한다. 묵직하게 떨어졌던 베의 매듭은 천을 풀어냄과 동시에 가볍고 유연한 선을 그린다. 고푸리는 이어지고 이어져 몇 번이고 매듭을 풀어낸다. 그 의식은 박동수 씨의 한과 함께 박진미의 미련까지 풀어냈다.
마주 보는 하나의 길 위에서 동수 씨는 앞으로 나아간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앞만 보며 가는 길 위에는 박진미가 있다. 길 위를 내딛는 발걸음이 빠르다. 동수씨를 지나치는 순간, 박진미는 그를 돌아본다. 동수 씨의 옆 모습을,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까지 빼놓지 않고 가득 눈에 담는다. 끝까지 앞만 보고 가는 동수 씨의 뒷모습을 보던 박진미는 다시 앞을 보며 걷는다. 동수 씨는,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가는 길에는 미련 한 톨 보이지 않는다. 그의 송신(신을 보내다)은 청신만큼 고통스럽지 않았지만, 그만큼 모른 미련을 다 털어버린 듯하다.
동수 씨가 떠나고 남은 것은 하얀색의 커다란 꽃이다. 색색의 치마를 걸치고 치마폭을 휘날리며 움직이는 그들 사이에 피어난 다섯 송이의 흰 꽃은 그 덕인지 더욱 창백해 보인다. 버석하게 흔들리는 꽃은 남겨진 시간을 살아가는 박진미의 품에 안긴다. 박진미는 무대의 가장 앞쪽에 한 송이, 한 걸음 뒤에 또 한 송이를 반복하며 4개의 꽃송이로 길을 만들어낸다. 크거나 격한 동작은 없지만 숭고하게 한 사람을 기림으로써 그 장면은 존재가치를 지닌다. 마지막 다섯 번째 꽃 한 송이는 그녀의 품 안에 안긴 채, 그녀가 가진 마지막 미련인 것처럼 고집스럽도록 품에 머문다. 그녀도 그런 한 송이의 꽃을 억지로 떼놓으려 하지 않는다. 산자가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미련이다.
무대가 시작하기 전, 사회를 보러 온 이재용 배우가 관객을 향해 이런 물음을 던진다. ‘당신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요?’ 이 질문은 나이에 따라, 처한 상황에 따라 모두가 다른 답을 할 것이다. 오늘 이 무대의 주인공이었던 박동수 씨는 ‘기억되는 사람’, ‘추억되는 아버지’로 느껴졌다. 기억을 되짚어 봤을 때, 아득히 느껴지지 않고 살갗으로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 박진미의 가장 측근에서 그녀를 응원했을 가족. 포근했던 기억들이 남았기에, 그 조각들이 연결되어 오늘의 의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많은 사람이 동행한 길 끝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시기를 바라는 공연은 하나의 길을 묻으며 막을 내린다.
나에게 ‘죽음’이란 여전히 차갑고 외로운 단어이다. 주변 사람들을 잃을까 두렵고, 내일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막막하다. 많은 죽음을 겪어보지 않았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는지 나로서는 확신할 수 없다. 그저 견뎌야 하는 건지, 갈피 잃은 슬픔을 분출해야 하는 건지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고 가르쳐 줄 수 없다. 아무도 알려줄 수 없기에 두려운 길에 대해 박진미는 ‘기억하라’고 말한다. 추억하고,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만나라고 한다. 한시간가량의 공연에서 박진미는 아버지를, 죽음을, 미련을 만났다. 공연을 끝낸 그녀는 홀가분해 보인다. 그녀가 마련한 길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존재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고찰해 보는 시간을 가진다.
박진미무용단은 2008년에 창설되어,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기 공연 <달구벌 打. 짓>을 비롯해 <경가만무>, <불혹지무> 시리즈, <시선의 궤적> 등 끊임없이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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