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으로, 내가 나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춤추다
- 이야기춤 '따라하기 - 한 사람이 구성되기까지'
수창청춘극장 2022 수창은 사랑이야 #1
- 이야기춤(안무 박예지) '따라하기 - 한 사람이 구성되기까지'
2022년 3월 27일 (일) 16:00 / 수창청춘맨숀
- 주최 : 수창청춘맨숀
- 주관 : 이야기춤
- 안무 : 박예지
- 글 : 김상우
특별한 무대장치 하나 없는 공간. 아니, 특별하지 않은 무대장치 하나, 조명 하나 없이 빈 공간에 놓인 것은 전시된 그림 작품과 관객. 그리고 두 사람의 무용수뿐. 화려한 연막이나, 빔프로젝터, 날카롭고 절도있는 군무, 그 흔한 조명의 깜빡임과 암전조차 없지만, 그래도, 아니, 그렇기에 충분히 매료될 수 있는 공연이 만들어졌다. 이 공연이 가진 가장 강한 힘은 이야기였다.
공연의 시작은 관람이었다. 한창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공간에서의 공연임을 활용한 하나의 관객 참여 장치이리라. 관객들이 벽면을 따라 걸으며 전시된 그림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넣었다. 전원이 한 바퀴를 다 돌았다고 생각했을 때쯤, 담소를 나누던 관객의 말소리가 끊어졌다.
소음을 끊어낸 것은 조금은 놀랄 만한 무대 연출. 창문 너머에서 비닐에 싸인 무언가가 넘어온다, 싶더니, 그 안에는 한 여인이 들어있었다. 무사히 바닥에 안착한 후 미동도 하지 않는 여인.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흰옷의 여성. 마치 짐을 잡아끄는 듯이 사람이 들어있는 비닐을 이리저리 잡아끌기를 한참. 마치 태동하듯이 비닐 속 여인이 작은 움직임을 시작했고, 다시 한참 뒤, 비닐을 뚫고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한다.
비닐을 벗어났음에도 물에 젖은 솜인형처럼 좀처럼 일어나지 못하는 그녀를 다시 잡아끄는 흰옷의 여성. 무기력한 것일까? 바닥에 있는 그녀를 마구잡이로 끌어도, 뒤집고 굴리며 다그쳐도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안아주고, 잡아당기고, 일으킨다.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일어나는 법을 모르는 듯했던 그녀는 자신을 이끄는 강제력에 기대어, 마침내 일어나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춤은 시작된다. 처음에는 흰옷의 여성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고, 나아가 그 손에 의지하지 않아도 상대의 모습에서 움직임을 학습하는 듯이 한 쌍의 데칼코마니적인 춤이 이어졌다. 흰옷의 여성은 그녀에게 있어 좋은 스승, 아니, 좋은 삶의 지시등이었다.
데칼코마니의 끄트머리에서 홀로 남은 그녀는 춤을 춘다. 누군가를 거울삼지도, 가르침을 받지도 않은 자신의 춤. 모방의 끝에는 자유가 있었다. 오랜 다그침과 배움 끝에 그녀는 드디어 자신을 찾아낸 것이다.
그 자유에 박수를 보내듯이, 클래지컬한 연주곡이 아닌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가요가 흘러나와 그 몸짓에 의미를 더했다.
음악에 맞춰 즐겁다는 듯 웃으며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에서 어떤 감동, 혹은 울컥거림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느낀 것은 오직 그 장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야기의 완성은 무엇일까? 극적인 연출? 어떤 반전?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야기의 완성은 서사. 이 울컥거림은 단 하나의 극적인 장면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에 앞선 그녀의 탄생적인 모습, 그녀를 다그치고 안아 올리는 손짓, 힘겹게 일어서 함께 춤을 추며 삶을 배워가는 몸짓. 그 모든 것들이 쌓여 있었기에, 그녀의 자유로움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자유를 얻은 그녀가 성장해나가며 마주친 것들은 흔들림, 지침, 기다림, 고독, 그리고 그것들의 반복. 우리는 이것들이 쌓이고 쌓인 것을 일상이라고 부른다. 그녀의 성장은, 우리의 성장은 지루한 일상의 숨 막힘과 함께 자라났다.
그 안에서 상처를 입기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상처가 남긴 것은 좌절이 아니라 단단함이었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내가 나임을 알게 만드는 심지가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내가 나를 인정하는 내 삶을 완성해나간다.
인생의 시작은 어쩌면 누군가의 모방에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모방을 넘어서 나를 찾아낼 것이고, 자유를 찾아갈 것이고, 텁텁한 세상 속에서 그럼에도 살아갈 이유를 모색해나갈 것이다.
인간의 기다림과 일상, 독립적이면서도 연속적인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표현한 우덕하 작가의 <기다리는 사람들>의 전시와 함께 진행된 공연.
전시 그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무대는 공연 전의 그림 감상으로 무대의 본질을 이해하게 했고, 공연 후의 재감상으로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만드는 좋은 화학작용을 끌어내고 있었다.
또한, 내레이션과 가요, 그리고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 춤으로 쉽게 이해하며 감상할 수 있는 친절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무용 공연을 가볍게 접근하게 만들 수 있는 공연의 첫걸음은 아니었을까?
쉬움의 힘을 믿는 무용 단체 이야기 춤의 첫 공연, <따라하기 – 한 사람이 구성되기까지>는 이름 그대로, 이야기를 춤추었던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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