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지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는 반전
- 박진미무용단 프로젝트 2022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
박진미무용단 프로젝트 2022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
2022년 3월 19일 (토) 16:00 / 봉산문화회관 가온홀
- 주최 : 박진미무용단
- 글 : 김상우
- 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추억. 추억이라는 단어는 어째선지 밝은 느낌을 가져다준다. 밝고, 따뜻하고, 때론 아련하고, 그리운 설렘. 또는 일렁임. 하지만 추억이 우리에게 있어 밝을 수 있는 까닭은, 내일도 우리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은 아닐까.
박진미무용단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지금, 우리의 일상은 일그러졌다.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은 불편함을 불러온다. 우리는 그 불편함에 익숙해지려 하지 않는다.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은, 곧 평소를 되찾으면 해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편함에 조금씩 적응해가고 있다. 이는 곧, 평소를 되찾을 수 없는 매일이 계속되었다는 것.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상의 변동은 우리에게 불편함을 주었고, 답답함을 주었고, 그에 대한 적응을 강요했다. 그렇게 달라진 일상에서 우리는 과거를 추억한다. 그리고 그 추억은 이루 말하지 못할 우울감을 불러온다. 지금 나의 내일에서는 그 행복했던 과거를 기대할 수 없으니까.
박진미무용단 2022 프로젝트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은 일상에서 떨어져나온 고립감과 상실, 그리고 내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에서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여성 무용수의 불투명한 미래와 이제 춤을 추지 못하는 상실감이 불러온 외로움, 그런 그녀의 외로움에 손을 내밀어주는 동료와 함께 다시 한번 춤을 되찾아가는 반전과 재반전의 서막에 대해 이야기한다.
박진미무용단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되돌아가지 못하는 추억을 회상하며 전염병과 전염병이 불러온 낯선 사회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듯, 쓰러지거나 몸부림치는 모습으로 시작된 무대. 그리고 곧 대열이 정리되더니,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군무로 관객의 시선을 끌었다.
화려하게 펼쳐진 군무 뒤에는 홀로 남은 여성과 빔 프로젝터로 무대 뒤에 떠오른 보름달만이 남았다. 어두운 무대 위에서 그녀는 괴로운 듯이 흐느적거렸고, 때론 힘겨움에 무너진 몸으로 상실을 춤추었다.
시력의 상실, 그리고 미래의 상실. 남은 것은 과거뿐. 좋았던 기억, 추억은 두 번 다시 내게 찾아오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 추억이 빛나면 빛날수록 얽매이고, 내일이 두렵거나, 어제에 살게 된다. 그래서 그녀의 춤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힘없고 슬퍼 보였던 게 아닐까.
박진미무용단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겨울의 새벽 같던 무대를 지나, 그녀의 동료들이 분위기를 바꿨다. 다 같이 모여 춤을 추고, 서로를 바라보고, 기대는 모습들. 얼마 후에는 장기자랑을 하듯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춤을 뽐냈다. 마치 텅 빈 그녀의 마음에 무언가를 채워 넣으려는 것처럼.
다시 막이 바뀌면, 그녀의 도전이 시작된다. 다시는 출 수 없을 줄 알았던 춤사위가 곡선을 그린다. 쉽지는 않지만, 꺾이고 힘이 들 때도 춤의 곡선은 멈추지 않는다.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과, 가졌던 것을 잃고 다시 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 의미도, 힘겨움도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것은, 그만큼 그리웠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선뜻 다가온 종막. 흰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짓하며 넓은 무대를 빼곡하게 채운다. 힘 있고 절도 있는 군무는 서막에서처럼 관중의 집중도와 긴장감을 높여주었다.
박진미무용단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그 흰옷의 바람 사이로 비집고 나온 것은, 바로 그녀. 흰옷의 무용수들이 일렬로 각자 바닥에 누워 한 방향으로 구르며 하얀 물결을 만들면, 그 물결 위로 그녀가 조심스럽게, 하지만 확실하게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는 찾을 수 없으리라 믿었던 것을 다시 손에 넣으려 몸짓하는 그녀는 이내 모두와 함께 춤을 나누고, 호흡을 나누며 녹아 들어갔다. 마치 이 정도 시련쯤은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힘겨웠던 우울감의 하루, 하루를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만들 하나의 반전, 그 서막을 그리며 가슴이 미어지고, 그러면서도 웅장하고, 그리고 빛이 있었던 무대는 막을 내렸다.
박진미무용단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우리는 지금 일그러진 일상 위에 이상적인 어제를 세워놓고, 불편함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무서운 것은 이 불편함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제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더라도 확실히 이어지는 내일이 있다는 것을, 우리 삶의 우울한 푸른색을 뒤집어 나의 빛깔로 물들일 반전의 서막은 다름 아닌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또 다른 시작, 반전의 서막’은 말하려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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