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살아내기
대구문화창작소 대구애서愛書 시리즈 10
박영현, 오하솜 '세상에서 살아내기'
2023년 08월 27일(토) 오후 6시 / 퍼팩토리소극장
- 글 : 윤재향
- 진행/사진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예술이란 무엇일까.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고, 글을 쓰는 사람들. 세상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이상과 현실의 기로 앞에 서고 만다. 대중성과 예술성 사이를 끝없이 고민하다 그 아찔한 경계에서 내린 결단이 비록 ‘세상에서 살아내기’라는 쉽지 않은 목표를 만들지라도 세상에 ‘나’를 드러내고 만다. 그러고 말 것이다.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울창하게 자라고 있는 나무가 아니라, 하늘에 뿌리를 둔 채 뒤로 조금씩 무성해지는 나무. 욕심이 많고, 사랑이 많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 손뼉을 치게 만드는 나무. 살아내기를 모처럼 응원하게 만드는 나무. 어쩌면, 예술이란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 거꾸로 자라는 나무
작은 소극장에 모인 관객들. 검은 적막이 걷히고 조금씩 연기가 피어오른다. 조명을 받으며 꿈틀대는 한 무용수의 발끝에는 한 포기의 커다란 풀포기가 달려 있다. 그녀의 팔과 손이 뿌리라면, 저 나무는 땅속 깊이 뿌리 내리지 않고도 살아내고 있는 셈이다. 객석의 한 사람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무용수의 섬세한 눈빛 속 흔들리고 있는 자아가 보인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녀의 표정이 마치 삶의 희로애락을 직면하고 있는 우리의 얼굴 같다.
무용수는 곧 새가 둥지를 만들 듯 조심스레 풀포기를 모으기 시작한다.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던 그녀, 세상을 향해 날갯짓하듯 자유롭게 팔과 다리를 내뻗는다. 그러나 삶은 녹록지 않다. 한 발로 비틀거리며 애써 중심을 잡아내는 날도 있고, 풀포기에 귀를 가져다 댄 그녀처럼 누군가 속삭이는 작은 한 마디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날들도 있다.
곧 나타난 다른 무용수. 그녀의 손짓을 따라 거꾸로 자라던 나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인형극 속의 인형처럼 힘없는 뼈마디가 좌우로 흔들리는 순간, 또 한 명의 무용수가 적막 속 당당한 발걸음을 딛는다. 이윽고, 두 사람의 자아를 조종하기 시작한다. 나를 조종했던 어떤 영혼은 다른 영혼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작은 곰인형을 품에 안기고, 입꼬리를 올려 웃게 만든다. 인형을 들고 있는 사람이 마치 인형이 된 것처럼, 서로가 서로의 인형이 되어가는 것처럼 저들은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고 또, 움직여갈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세 영혼이다. 그렇다면, 사실 저들은 모두 한 몸일지도 모른다.
- 둥지 밖으로 나온 새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리고, 장면이 전환된다. 주춤하던 셋은 이전보다 활기차게 움직이고, 때때로 숨죽인다. 빠른 템포의 배경음이 그들의 몸짓을 자유롭게 만들 때, 비로소 온전히 그들다운 그들이 되어간다.
어쩌면, 저 시간은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다. 세상을 향해 기웃거리기 시작한 갓 스물의 아이들처럼, 울타리와 울타리 밖의 경계에서, 이상함과 이상의 경계에서 기웃거린다. 저 새들은 둥지 밖을 벗어나 이탈을 맛본다. 저들이 마주한 삶은 무수히 해체되고 조립되어간다. 셋은 이제 완벽한 수동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서로에 의해 움직이다가도 자유로운 영혼이 깃든 새처럼 온전한 나를 찾는 시간을 보낸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의 음성. 마치, 어릴 적 기억 속 엄마의 손을 잡고 걷던 주말의 전통 시장 거리를 성인이 된 내가 홀로 걸어가는 기분이 춤이 된다면 저런 움직임일까. 조금 어색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설레는 시작이 마디마다 깊이 새겨지고 있다.‘
세상에서 살아내’고 있는 청춘들의 요동. 점점 빨라지는 배경음악에 온몸을 맡긴 그녀들 중 하나가 모자와 선글라스, 코트를 착용한 채 만화영화 ‘명탐정 코난’속 등장인물을 차용한 재치있는 퍼포먼스로 장면을 환기한다.
- 잘 봐, 내 삶의 이야기
분주하게 움직이던 세 사람. 풀더미를 걸어놓았던 행거에 투명한 비닐을 붙인다. 풀, 곰인형, 꽃송이, 종, 행거 코트과 선글라스, 모자 그리고 비닐 시트지와 물감까지 다양한 오브제를 활용한 재미 속에 춤을 감상하는 재미에 각종 조미료가 더해진다. 그 맛은 짜고, 달고, 시기도 하다.
‘아이가 태어나서 무언가에 중독되는 모습’이라는 내레이션이 흐르고 난 뒤 나는 ‘중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끝을 향해 달려가는 무대에 집중했다. 과연 저것은 무엇에 의한 중독일까.
물감을 이용해 투명 비닐에 그림을 그리는 한 사람과 그림이 춤이 되듯 몸을 움직이는 두 명의 무용수.‘무언가에 중독되는 모습’이라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이 퍼포먼스로써 재현되며 그녀가 그린 작품이 하나씩 완성되어 간다.
첫 번째. 웅크린 사람, 두 번째. 풀과 나무, 세 번째. 인간의 뇌.
고통 속에서 고뇌하는 한 사람, 자신의 발목을 잡고 놓지 않는 늪을 헤맨다. 그 마음은 때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마음 한편에 피어나는 파릇파릇한 희망이기도 하다. 빛과 어둠을 동시에 안고 있는 양면의 얼굴.
결국, 그의 뇌 속을 가득 채운 것은 단 하나,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가끔 나도 모르는 사이 심장을 새까맣게 태워버린다. 시작과 끝을 알지만 쉽게 풀어낼 수 없는 실타래처럼 꽁꽁 엉켜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어둠이 내린 뒤, 물고기가 유영하여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처럼 깊은 바닷속을 헤매다 다시금 사랑에 도착해버리고 만다.
그렇다. 사랑은 다시 또, 사랑인 것이다.
붙잡는다고 가둘 수 없고, 온전히 놓아버릴 수도 없는 것. 사랑이라는 중독에 빠지면서 우리는 거꾸로 자라나는 이상한 나무가 되거나, 둥지에서 나와 날개를 처음 펼치는 유약하고 작은 어린 새가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또 살아내게 하는 어떤 희망은 무언가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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