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거나, 어디에나 속해 있거나 'GREY ZONE'
제37회 퍼팩토리2030예술극장 - 루카스크루 'GREY ZONE'
2023년 8월 6일 / 퍼팩토리소극장
- 글 : 최윤정
- 사진/진행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김민수(루카스크루 예술감독)는 '야경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자연을 파괴한 우리 자신을 아름답다 표하는 모순적인 행동'이라 말한다. 'grey zone' 은 '애매한 영역, 불분명한 범위'를 뜻한다. 'GREY ZONE'에서 선보여질 무대는 흑과 백,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의 순간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거나, 어디에나 속해 있는 그들의 이야기는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시작된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결국엔 '나'이기에 <인생은 아름다워!>
안무 김민지 / 출연 이민근, 안지연, 김민지
무대로 뛰어 들어온 무용수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극은 인생의 즐거움과 가치에 대해 말한다. 이어 무대로 달려온 두 명의 무용수는 술래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멈추고, 또 뛰어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무용수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관객을 바라보며 웃는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아이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짓궂고, 때로는 해맑게 무대를 누비는 모습은 놀이터보다는 학교 교실이, 교실 밖의 운동장이 생각난다. 그들의 발아래는 흰색의 무대 바닥이 아니다. 푸르른 잔디가 가득 깔린 볕 좋은 운동장이 무용수들의 발밑에 자리한다. 이들의 움직임에서는 내 삶의 있었던, 있을 것만 같은 어느 한 날의 추억이 담겨있다. 어린 날의 따뜻했던 시간이 세월을 뛰어넘어 찾아왔다.
이 무대에서 걱정이라거나 불안은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들의 세계에는 희망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즐겁고, 유쾌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동작 또한 크고 경쾌하여 더욱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떠오르는지도 모르겠다. 이 극에는 아이들이 즐겨하는 놀이가 자주 등장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동대문을 열어라' 같은 유년 시절에 했던 놀이와, 서로를 간지럽히고, 나비를 잡는 행위로 아주 사소한 일임에도 이 시간을 살아가는 것 자체에 가치가 있지 않겠냐는 메시지를 건넨다. 쓰러지고, 어떠한 상황에 미련 또는 후회가 남아도 이미 지나갔고, 즐거운 시간 또한 흘러가지만, 그에 대한 흔적은 어떤 것이든 고스란히 나에게 남았기에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 '인생' 아니겠는가.
#혼란과 불안 그 사이에서 <회색 구간>
안무 장민주 / 출연 장민주, 김민수
드뷔시의 'Claire de lune'과 함께 무대 한가운데에서 한 무용수가 몸짓을 시작한다. 무용수는 과거에 얽매여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우아하고 느린 음악과 대비되게 무용수의 몸짓은 가볍고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다고도 느껴진다. 무대 대부분 무용수의 얼굴은 머리카락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머리 없는 사람의 몸짓처럼 보이기도 했다. 머리 없는 인간의 불안, 생각하지 못하기에 어찌 살아가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이 무대를 가득 채웠다. 본인 안에 내재된 불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용수는 느리고 아름다운 곡 위에서 치열하게 움직인다. 자신을 찾지 못해 불안한 걸까, 그럼에도 살기 위해 치열한 걸까. 무용수는 이내 자신의 손에 입맞춤을 하고 바닥에 남긴다. 자신이 이곳에 존재했다는 흔적이었다.
이어 의자와 함께 나온 무용수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이 불안은 아주 작은 움직임에서 시작한다. 몸을 움찔거리고, 입을 거칠게 닦고, 자신의 팔을 제어하며 전형적인 불안의 증세를 보이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무용수의 발짓은 경쾌하다. 그러나 그런 경쾌함과는 대비되게 불안감은 갈수록 증폭한다. 가볍게 시작한 스텝은 갈수록 빨라지고 동작이 커진다. 한 마리의 물고기 같기도 하고, 들짐승 같기도 한 움직임은 거칠면서 유연하고 동시에 날렵하다. 무용수는 관객을 등지고 의자를 마주 본 채 천천히 신발 끈을 풀고, 신발을 벗는다. 맨발이 된 무용수는 상의마저 탈의한 채 뒤돌아보지 않고 퇴장한다. 자신의 불안을 이 무대에 전부 털어버리고, 오로지 자신만이 앞으로 나아갈 것처럼.
#완전한 흑(黑)을 위하여 <Looked at the hands>
안무 김민수 / 조안무 Martina Balzamo / 출연 김민수, 장민주
검은 옷으로 갈아입은 두 무용수는 이전 무대와는 완전히 다른 공연을 선보인다. 두 사람은 정적으로 움직이다가 이내 위태롭게 흔들려 곧 쓰러질 것 같이 보인다. 서로를 마주 보며, 혹은 앞뒤로 서서 동일한 행동을 취하는데 이는 의식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서로가 동일한 인물임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볍지만 격정적인 안무는 이 무용수 둘이 조화로운 하나처럼 보이게 한다.
두 무용수는 같은 동작을 하지만, 그들의 목적은 확연히 다르다. 두 명의 사람이 손을 천천히 뻗어 올리고, 다른 손은 총 모양을 만들지만, 한 총구는 자신의 머리, 다른 한 총구는 앞선 사람의 머리로 가져다 댄다. 자살과 타살이라는 공존할 수 없는 두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무대 안에서 강렬하게 녹아있다. 나를 죽이는 나의 불안, 나를 죽이는 외부의 압박은 끝까지 내몰아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묵직한 비트 위에 모호한 멜로디가 흐르고 두 무용수의 몸짓과 감정은 격렬하게 요동친다.
극이 마지막으로 치닫을수록 역동적이고 과격한 움직임은 서로를 옭아매고, 손과 발이, 무대 위를 가득 채운 감정들이 엉킨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위태로움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내재된 불안, 혼란 같은 통상적인 말로 두 사람을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들의 춤은 짙은 여운을 주고, 후에는 먹으로 무대를 완전히 검게 칠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검은 춤사위는 묵직하지만, 그들의 몸짓은 깃털보다 가볍기에 이들은 유려한 붓질로 무대를 검게 칠해나간다.
#내가 선택한, 선택하지 않은 하늘 <'Blue' sky>
안무 김동규 / 출연 김동규, 백묘정, 이민근, 김민지, 안지연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내 주위를 둘러보는 무용수들의 시야를 채운 것은 어둠이다. 혼란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으며 분열과 균열 무질서가 무대를 채운다. 무한의 굴레로 움직이는 동선은 영원을 뜻한다. 무한히 반복될 어둠, 혼란, 균열. 그 안에서 검기에 영원히 알지 못할 무언가를 수확하며 이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만 여전히 하늘은 검고, 어둡다.
무대 위의 모든 무용수가 쓰러졌을 때, "It isn't a thing to think."라는 문장이 흘러나온다. '생각할 일이 아니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 문장은 'Colin Stetson 15 The Lighthouse V'라는 음악의 첫 가사이자 내레이션이다. 빛을, 보이지 않는 무한한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이 음악처럼 무용수들은 계속해서 천장을 보고, 벽을 만지고, 이내 아주 작은 희망을 발견한다. 그러나 높기만 한 천장은 닿지 않고 실낱같은 희망은 손끝을 간지럽히기만 한다.
닿을 수 없었던 하늘은 어디선가 나타난 흰 셔츠, 파란 테이프, 사다리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저 검은색일 뿐이었던 하늘에 구멍이 뚫렸고, 그들이 선택한 색은, 어쩌면 예정되어 있던 하늘은 푸른색이다. 검은색이었던 세상에서는 자랄 수 없을 것 같았던 식물이 하늘에 걸렸고, 무용수들은 파란 구멍을 바라본다. 검은 세상에서 하늘을 바라본 이들은 자유롭고 이전보다 쾌활하다. 불안에서 해방이 된 그들의 몸짓은 역동적이고 벅차오름까지 느껴진다. 이내 완전히 한세상을 부수고 나온 이들은 파란색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언제까지고, 언제나 그랬듯 파란색일 하늘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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