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이 말하는 '나'의 이야기
제35회 퍼팩토리2030예술극장 '올댓스테이지'
2023년 6월 3일 / 퍼팩토리소극장
- 글 : 최윤정
- 사진/진행 : 대구문화창작소 이재봉
춤은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속에 내포된 뜻이 전달되지 않는 건 아니다. 춤은 몸짓으로 말하고, 움직임으로 전달한다. 주어가 명확하지 않은 말 한마디 없어도 어렴풋이 그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입 밖으로 내뱉고 주어와 의사를 명확히 표현하는 말들은 의도가 달라질 수도 있고, 그에 상처받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다. 몸짓은 어떠한가. 몸짓의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오늘 감상한 4개의 작품은 각기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각자의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를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들려주려 한다. 지금은 잠시 억압된 사회에서 벗어나 소리없는 그들의 언어를 들을 차례이다.
하쿠나마타타 / 안무 김민지 ⓒ이재봉
# 아무런 걱정 없이 '하쿠나마타타'
- 안무 : 김민지
정적 속에서 무용수들이 몸을 움직인다. 움직임은 크지만 공기만을 가를 뿐,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다 쿵, 쿵. 발 구르는 소리가 들린다. 쿵, 쿵, 짝, 짝. 휘익- 휘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공기를 타고 퍼져나간다. 반복되는 소음 속에서 반복적으로 움직이는 무용수들은 기계적이다. 가만히 서서 움직이다가 어지럽게 동선이 얽힌다. 얽히고, 얽히다가 이내 몸을 경련하듯이 부르르 떨고는 정적. 음악이 흘러나온다. 동시에 한 명의 무용수가 얽혀있는 동선을 무너뜨린다. 반복적으로 움직이던 그 사이를 풀어나간다. 다 함께 같은 동작을 하며 관객을 향해 미소 짓는다. 서로를 따라 하다 순간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내가 누군지, 여기가 어딘지. 다른 사람들이 웃고 있을 때, 웃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이 웃지 못할 때, 웃는다.
인간의 머리는 한 번에 한 가지 감정만이 존재할 수 없고, 한 가지 생각만을 할 수 없다. 머리를 가득 채운 걱정들 사이로 '희망'이 불쑥 찾아온다. 이렇게 들어온 희망은 걱정들의 연결을 끊어놓는다. 서로의 손을 놓쳐버린 걱정들은 희망에 동화된다. 사랑에 동화되는 동안 걱정들은 스스로가 무엇인지 잊어버린다. 어쩌면 이 넷은 자신의 머리보다 커다란 걱정을 안고 사는 다른 개인일지도 모른다. 모두가 걱정 가득한 현대에 살아가기에 뭉뚱그린 하나의 걱정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걱정은 넷이었다가, 하나였다가, 셋이었다가 모두 사라진다.
하쿠나마타타 / 안무 김민지 ⓒ이재봉
걱정이란 그런 것이다. 하나였다가, 넷이었다가, 둘이었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형태도, 무게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은 '닥쳐올 것'이라는 두려움만 가득히 심어준다. 실제로 그렇지 않음에도. 다른 사람들처럼 웃고, 걷다가 뒤를 돌아보라. 당신이 직전에 하던 걱정이 뭐였는지 생각나는가.
등산 / 안무 김도연 ⓒ이재봉
# 이정표가 없어도 걸어가야만 하는 '등산'
- 안무 : 김도연
사람은 누구나 혼자 태어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잉태로 태어난 사람은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지만 걸어갈 수 있다. 서서 걸어가는 것도 아닌, 앉아서 발을 내딛는 수준이다. 자신을 지탱해 주던 것이 사라질 때, 무용수는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다. 혼자 설 수 있는 힘이 생길 때까지 걸어간다.
정상은 까마득하게 높다. 아무리 걸어도 닿지 못한다. 언제쯤 똑바로 서서 정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정상으로 가는 길은 숨이 턱턱 막히고, 곁에는 아무도 없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고독하다. 뒤에서 받쳐주던 이도 없는데 홀로 걸어간다. 정상을 향하여.
등산 / 안무 김도연 ⓒ이재봉
이들의 움직임은 유려하고 부드럽다. 가볍고도 묵직한 게 움직임의 농담이 명확하다. 한 폭의 수묵화 같다. 화선지에 먹을 가득 담은 붓으로 완만하고 올라갈 수 있을 법한 산을 그린다. 그들이 그리는 산은 태산이 아니다. 누구나 올라갈 수 있고, 누구나 갈 수 있을 법하게 보인다. 남들이 보기엔 높지 않지만, 길 위에 선 내가 보기엔 까마득하게 높을 뿐이다.
길에 이정표는 없다. 북쪽으로 10km, 이런 표지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있다고 해도, 어느 쪽이 북쪽인지 알 도리가 없다. 우리는 부딪히고 깨지며 산을 오른다. 오르기만 한다. 내려오는 길은 없다. 서로를 지탱하던 무용수들이 끝과 끝으로 떨어져 자기만의 길을 찾듯, 자신의 길을 찾아 계속해서 높이 올라가야만 한다.
유영 / 안무 김다영 ⓒ이재봉
# 초록 그물 아래 자유는 존재하는가 '유영'
- 안무 : 변다영
그물 아래 있는 물고기를 자유롭다 말할 수 있는가. 자유를 외치는 이들은 그물에 걸린 채 무대로 등장한다. 물속을 헤엄치는 듯한 몽환적인 음악, 검은색의 무대에서 혼자 색을 가진 초록색의 그물. 그물 안에서는 탈출을 하기 위해 치열히 움직인다지만, 밖에서는 무엇 때문에 쉬지도 않고 움직일까. 물고기의 지느러미를 표방한 발짓은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물에 걸리면 그물은 무용수들에 의해 들쭉날쭉해진다. 여기서 찌르고, 저기서 찌르지만 그물은 조용히 모든 것을 포용한다. 동시에 그들을 속박한다.
그물을 가두었다. 동시에 무용수도 그물을 가둔 통 안으로 들어간다. 그물을 발밑에 둔 채 통 안에서 탈출하려 시도하지만 시도할수록 그물이 발을 옭아매고, 조여온다. 스스로 구속에 발을 들였지만 제 발로 벗어날 수 없다. 사람들의 도움으로 빠져나와 그물을 통 안에 가두었지만, 구속은 여전하다. 그물은 다시 그들을 휘감는다.
유영 / 안무 김다영 ⓒ이재봉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 무대의 마지막 곡, 'Take Me Home, Country Road'의 가사이다. '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다줘요. 나의 보금자리로.'. 그들이 원하는 자유는 완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사회로부터, 가족이라는 소속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그물은 '소속'이다. 소속감은 사람을 구속시키기에 그에 대한 피로감, 지침, 긴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시 그물에 얽힌 것은 그 소속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거대한 사회적인 소속이 주는 압박에서 벗어나 최소한의 소속만을 두른 채 바다를 헤엄쳐가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 넓고 차가운 바다에 완전히 혼자가 되어 헤엄치는 것은 두려울 것이기에.
누가 내 머리에 약 탔어? / 안무 박영현, 오하솜 ⓒ이재봉
#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누가 내 머리에 약 탔어?'
- 안무 : 박영현, 오하솜
누가 나일까. 풀을 지켜보는 나, 풀에서 분리된 너. 무대 한가운데엔 풀 무더기가 자리하고 있다. 풀 사이에서 다섯 손가락이 뻐끔댄다. 웃으며 풀숲을 빠져나온 무용수는 앞으로 기어간다. 삑, 삑, 바닥에 살 스치는 소리를 내며. 뒤에 위치한 풀에선 팔이 삐져나온다. 얼굴을 풀에 가려 마치 풀이 춤을 추는 듯한 모양새이다. 풀에서 태어난 것 마냥 분리된 무용수는 폭력적이다. 다른 무용수를 조종하려 들고, 억압하려고 든다. 그의 손짓대로 무용수가 움직인다.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 샘에 비친 것 마냥 두 무용수의 손이 마주보고 움직인다. 같은 손가락이 올라갔다 내려간다. 둘이 땅따먹기를 한다. 과거에 행복했던 기억이 잔상처럼 스쳐 지나간다.
폭력적인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기괴함. 내가 내가 아닌 듯 제어되지 않고, 무언가를 뱉어내지만 계속해서 고장 나기만 한다. 고장 나버린 내가 마주한 것은 놓쳐버린 나이다. 그는 통제되지 않는다. 겁이 많고 숨기에 급급하다. 산만하며 해방되지 못한 채 폭력으로 구속하기만 한다. 서로의 육체를 강하게 옭아매며 서로를 탐한다. 그들이 탐하는 건 무엇일까. 하나의 온전한 육체, 정신, 하나의 완전한 사람. 또 다른 내가 나를 억지로 웃음 짓게 한다. 손이 입에서 떨어져 눈을 가린다. 시야가 가린 채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은 지옥이다. 그들은 서로 지옥을 걷게 하지만 떨어지면 살 수 없다. 둘은 딜레마의 시작이자 끝에서 서로를 탐한다. 살아있다는 느낌, 그것에서 오는 온전한 생명. 그것만이 그들을 살게 할 수 있다. 네가 나일 때, 내가 너일 때, 서로가 하나일 때, 둘은 완전한 한 명의 사람이 된다.
누가 내 머리에 약 탔어? / 안무 박영현, 오하솜 ⓒ이재봉
'그래, 나는 고통스러워, 매 순간 제발 웃기만을 원해.' 고장 나버린 사람은 스스로 웃을 수 있는가. '약'은 흔히들 뜻하는 치료제가 아니다. 순간의 고통은 감소시켜주지만 몸은 더 망가지는 게 복용할수록 해롭다. 그러나 그 순간의 해방이 고파서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끝내 미쳐버리면 '나'를 원망할까, 애초에 그럴 정신이 남아 있긴 할 것인가. 그러나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나'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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